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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찾아
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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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5 00:59
서소문근린공원본래는 서문 밖 순교지로 불리는 천주교 성지였다.
본래 1984년 12월 순교자 현양 탑이 세워졌으나 1999년 5월 15일 다시 건립한 것이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높이 15m의 주탑과 13m의 좌우 대칭 탑 등 3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 기단 위는 유리로 막아 물이 흐르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의 상징인 물을 대비시킨 것이다. 주탑 앞부분에는 순교의 참상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을 붙였으며 세 탑 모두 윗부분 구멍에서 가운데까지 7개의 금빛 선을 흘러내리게 하고 있다. 이 선은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승리와 천주교 7대 성사(聖事)를 상징한다.
본래 1984년 12월 순교자 현양 탑이 세워졌으나 1999년 5월 15일 다시 건립한 것이다. 재료는 화강암으로 높이 15m의 주탑과 13m의 좌우 대칭 탑 등 3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 기단 위는 유리로 막아 물이 흐르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의 상징인 물을 대비시킨 것이다. 주탑 앞부분에는 순교의 참상을 형상화한 청동 조각을 붙였으며 세 탑 모두 윗부분 구멍에서 가운데까지 7개의 금빛 선을 흘러내리게 하고 있다. 이 선은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승리와 천주교 7대 성사(聖事)를 상징한다.
덕수궁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무른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부르고 7년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중명전덕수궁(德壽宮) 돌담길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현재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u0027중명전(重明殿)u0027이 있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u0027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숭례문숭례문(崇禮門)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1448년에도 크게 고쳐지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양측에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1908년 도로를 내기 위하여 헐어 내고 성문만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2006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점심식사(아하바 브라카) 아하바-브라카는 식음료를 판매하는 카페u0026레스토랑에 가구, 소품 갤러리 기능을 접목한 신개념 업장이다.
통소나무 원목가구와 다양한 소품으로 세팅된 1층 ahaabah, 지하1층 braka로 공간이 구분되며 모든 원목 식탁과 의자 등 인테리어와 세팅 자체가 그대로 판매목적으로 전시된 견본품으로서 고객이 직접 원목가구를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체험하는 것을 도와드리는 가구 파는 레스토랑이다.
통소나무 원목가구와 다양한 소품으로 세팅된 1층 ahaabah, 지하1층 braka로 공간이 구분되며 모든 원목 식탁과 의자 등 인테리어와 세팅 자체가 그대로 판매목적으로 전시된 견본품으로서 고객이 직접 원목가구를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체험하는 것을 도와드리는 가구 파는 레스토랑이다.
서울 약현성당약현(藥峴) 성당(聖堂)은 길이 약 32m, 너비가 12m로 이루어진 396m²(120여 평)의 소규모 성당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886년 고종 23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천주교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명동 성당 아래 공소(公所)로 설립되었다. 1891년 당시 명동 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두세(Doucet) 신부가 합동 (蛤洞)에 대지를 마련하고, 부주교인 코스트(Coste) 신부가 설계와 시공감독을 맡아 그 다음해인 1892년에 약현 성당이 탄생하였다. 이 성당이 위치한 곳은 예전에 약초를 재배했던 지역으로 u0027약초밭이 있는 고개u0027라는 뜻의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에 줄여서 u0027약현u0027이라고 했는데, 서울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사용되어 약현성당이란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